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8세 (문단 편집) === 후반 통치 === 윌리엄 틴들과 마일스 코버데일의 영어 번역본 《성경》이 존 로저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후 [[재세례파]] 인사들도 '''반역죄''' 혐의로 처형시켰다.[* 대놓고 이단 혐의로 [[순교]]하게 된 것은 가톨릭 복고 성향을 보인 [[메리 1세]] 치세에서의 이야기이다. ] 말년에 가면 헨리 8세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사실 헨리 8세는 중년에 이르러서도 마상 창시합을 하다가 [[낙마]]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쳤고, 그로 인해 장애가 생기면서 예전과 달리 야외활동을 마음껏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긴 스트레스 때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생활태도가 방종해졌고, 과식을 일삼으면서 고도 비만이 되어 버렸다[* 특히 [[채소]]를 멀리하고 대신 독한 [[술]]과 [[고기]]들을 마구잡이로 [[폭식]]하면서 비만이 더 심해졌다. 물론 당시 [[유럽]] [[왕족]]과 [[귀족]]들이 [[채소]]가 가난한 하층민들이나 먹는 저급한 식재료라며 싫어했고, [[고기]]를 마음껏 먹는 식생활이야말로 고귀한 습관이라고 여겼던 문화적 배경도 작용했다.]. 원래 다혈질적이고 충동적인 성미의 소유자였지만 다리를 다치기 전에는 기분이 좋을 때 그나마 너그럽고 호탕한 면모라도 있었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후로는 짜증을 잘 내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왕비를 둘이나 참수시키고 중용했던 관리들의 목까지 베어댔기 때문에, 신하들은 언제 헨리 8세의 심기를 거슬러 목이 날아갈까 두려움에 떨었다.[* 물론 그만큼 헨리 8세 때 잉글랜드 국왕의 왕권이 강력해졌으며, 정점에 달했다는 뜻도 된다.] 정서적으로도 굉장히 불안정했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병으로 인해 앓아눕는 일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몸 곳곳에 종기와 수포가 자라 보기에 몹시 흉했으며 악취도 지독했다. 게다가 통풍을 심하게 않았으며 낙마로 다친 다리의 상처는 크게 악화되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한편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다시 한 번 싸울 조짐을 보이자 마침 모어 성 조약에 따른 상납금을 받지 못하고 있던 참에, [[카를 5세]]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다시 돌입했지만 여기서도 별 소득이나 이득은 없었다. 심지어 카를 5세가 멋대로 프랑수아 1세와 화해하고 마무리짓자[* 카를 5세는 종교 개혁으로 인한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이반으로 동생에게 전담시키던 신성 로마 제국 문제도 신경써야했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도 있었기에 프랑스와 계속 싸울 수가 없었다.] 전비만 잔뜩 탕진하여 헨리 8세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앤 불린]]과 [[제인 시모어]]를 거쳐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제후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볼 생각으로, [[토마스 크롬웰]]의 추천 및 주선하에 [[클레페의 앤]]과 4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절반은 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데다 절반은 정치적 이유로[* 일단 [[클레페의 앤]]과의 결혼을 주선한 [[토마스 크롬웰]]에게 '배신감'을 느낀 듯한 정황이 있다. 또한 <수장령>에 반대하며 일으킨 반란이 제압당하면서 세력이 위축된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도 이 틈을 노려 하워드 가문을 중심으로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크롬웰을 재판도 없이 처형해버렸다.''' 또한 클레페의 앤과의 결혼도 '첫날밤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서 무효화시켰다. 하지만 크롬웰은 <수장령>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심지어 재무에서도 독보적으로 유능했던 관료였던지라, 천하의 헨리 8세마저 크롬웰의 처형 후에야 그 공백을 느끼며 뼈저리게 후회했다.[* 이후 신하들이 크롬웰을 모함했다는 식으로 역정을 냈다는 일화도 있다] 기껏 <수장령>으로 열심히 국유화한 교회 자산을 헐값에 처분하며 전비를 대다가 왕권이 기우는 단초가 본격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헨리 8세가 말년에 들인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도 아내라기보다는 영 까다로운 환자가 되어버린 늙은 남편의 실질적인 간병인이었다. 지금에야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 미화되기도 해서 드라마틱한 삶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의 재위 말년 즈음에는 튜더 궁정의 모두가 '''미친 왕'''이 빨리 죽기만을 기도했다고 한다. 결국 1547년 1월 28일에 헨리 8세는 화이트홀 궁전에서 수도사들! 수도사들! 수도사들!이라는 말만 남기며 사망하고 만다. 이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사후 장례식이 치루어지고 시신은 윈저 성에 있는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묻힌다.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를 아내들중에서 가장 사랑하여 죽을때도 그녀의 곁에 같이 묻힌다. 여담으로 [[찰스 1세]]도 처형되고 나서 헨리 8세와 제인 시모어 곁에 묻혔는데 1888년에 세인트 조지 예배당을 보수하던 중에 헨리 8세, 제인 시모어, 찰스 1세의 관이 발견되었는데 멀쩡한 제인 시모어와 찰스 1세의 관과 달리 헨리 8세의 관이랑 안에 들어간 유골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어찌보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인과응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